75. 산 믿음의 양심(눅1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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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3-04-04 19:07 조회48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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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산 믿음의 양심(눅17:1-10).
믿음이라는 것은 도덕 아래 속한 것이 아니요 어떤 의식이나 법도에 속한 것도 아니요 산 믿음이라는 것은 그 양심에 속한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사람을 중심한 것보다도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는 양심의 활동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에게 자기 옳은 것을 나타낸다 하여도 형제를 실족케 하거나 용서치 않는 것이 있다면 그 믿음은 아무런 열매를 나타낼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기뻐하지 않으므로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어떠한 양심에서 움직여야 된다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 합니다.
1. 형제를 실족케 하는 일이 있을까 조심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1-2).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의 생명을 하나 같이 사랑하므로 남을 실족케 하는 일이 있다면 큰 화가 오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 대적이 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 없는 것이로되 형제를 실족케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조심해서 형제를 아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진리로 탈선된 길로 가지 않은 형제가 아무리 실수가 있다하여도 그 형제를 실족치 않도록 붙들어주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체험은 형제가 아무리 실수가 있고 나를 괴롭히는 일이 있다 하여도 그 형제를 아끼는 마음으로 붙들어 주고 일으켜 주는 일을 하고자 할 때에 내가 구하지 않아도 뜻밖의 큰 은혜가 오는 체험을 많이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일은 남을 실족하지 않도록 아끼는 사랑으로 대해 주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형제가 나를 억울케 하여도 같이 불평을 두지 않고 그 형제가 복을 받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항상 하늘로부터 강한 은혜가 나리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2. 형제를 얼마든지 용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3-4).
우리는 주님 앞에 용서를 받는 신앙심에서 형제의 죄를 너그러이 용서하는 맘이 없다면 십자가의 대적이 되는 일이니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마18-21). 회개치 않은 자를 용납한다는 것은 불의와 동참하는 일이 되지만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큰 죄를 범하는 일이 됩니다 (마18:35).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도덕에 속한 양심도 아니요 율법 아래 있는 양심도 아니니 너그러이 용서받은 양심에서 남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것은 내가 너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니 누구든지 형제의 죄를 용서할 때에 십자가에 속한 사람이 되고 형제의 죄를 용서치 않을 적에 십자가의 대적이 되는 사람입니다. 산 믿음의 양심이라는 것은 항상 예수님의 사랑의 불이 마음에 있는 믿음입니다.
3. 항상 자기가 하는 일에 부족감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산 믿음의 양심을 가진 자는 항상 자기가 수고할수록 자기 하는 일에 부족감을 깨닫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생각할 때에 밤낮으로 수고하여도 항상 자기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고 생각나게 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일을 하고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맘이 있다면 이것은 산 믿음의 양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해 보려고 할 때에 일을 할수록 점점 나는 아무런 일도 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나는 것은 점점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될 때에 그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다는 마음이 점점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할 것뿐이라는 마음을 가지면 주님께서 가장 큰 일을 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기독교 신앙 양심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 온 사랑을 받은 자리에서 깨끗한 양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양심 속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 없고 원망할 것도 없고 항상 그 사랑을 남에게 주고픈 마음밖엔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도덕 아래 속한 것이 아니요 어떤 의식이나 법도에 속한 것도 아니요 산 믿음이라는 것은 그 양심에 속한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사람을 중심한 것보다도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는 양심의 활동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에게 자기 옳은 것을 나타낸다 하여도 형제를 실족케 하거나 용서치 않는 것이 있다면 그 믿음은 아무런 열매를 나타낼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기뻐하지 않으므로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어떠한 양심에서 움직여야 된다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 합니다.
1. 형제를 실족케 하는 일이 있을까 조심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1-2).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의 생명을 하나 같이 사랑하므로 남을 실족케 하는 일이 있다면 큰 화가 오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 대적이 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 없는 것이로되 형제를 실족케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조심해서 형제를 아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진리로 탈선된 길로 가지 않은 형제가 아무리 실수가 있다하여도 그 형제를 실족치 않도록 붙들어주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체험은 형제가 아무리 실수가 있고 나를 괴롭히는 일이 있다 하여도 그 형제를 아끼는 마음으로 붙들어 주고 일으켜 주는 일을 하고자 할 때에 내가 구하지 않아도 뜻밖의 큰 은혜가 오는 체험을 많이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일은 남을 실족하지 않도록 아끼는 사랑으로 대해 주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형제가 나를 억울케 하여도 같이 불평을 두지 않고 그 형제가 복을 받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항상 하늘로부터 강한 은혜가 나리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2. 형제를 얼마든지 용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3-4).
우리는 주님 앞에 용서를 받는 신앙심에서 형제의 죄를 너그러이 용서하는 맘이 없다면 십자가의 대적이 되는 일이니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마18-21). 회개치 않은 자를 용납한다는 것은 불의와 동참하는 일이 되지만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큰 죄를 범하는 일이 됩니다 (마18:35).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도덕에 속한 양심도 아니요 율법 아래 있는 양심도 아니니 너그러이 용서받은 양심에서 남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것은 내가 너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니 누구든지 형제의 죄를 용서할 때에 십자가에 속한 사람이 되고 형제의 죄를 용서치 않을 적에 십자가의 대적이 되는 사람입니다. 산 믿음의 양심이라는 것은 항상 예수님의 사랑의 불이 마음에 있는 믿음입니다.
3. 항상 자기가 하는 일에 부족감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산 믿음의 양심을 가진 자는 항상 자기가 수고할수록 자기 하는 일에 부족감을 깨닫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생각할 때에 밤낮으로 수고하여도 항상 자기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고 생각나게 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일을 하고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맘이 있다면 이것은 산 믿음의 양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해 보려고 할 때에 일을 할수록 점점 나는 아무런 일도 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나는 것은 점점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될 때에 그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다는 마음이 점점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할 것뿐이라는 마음을 가지면 주님께서 가장 큰 일을 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기독교 신앙 양심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 온 사랑을 받은 자리에서 깨끗한 양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양심 속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 없고 원망할 것도 없고 항상 그 사랑을 남에게 주고픈 마음밖엔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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