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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서 설교

2. 요한 1서 2장. 성도의 생활(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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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1-02-24 11:03 조회1,739회 댓글0건

본문

2. 요한 1서 2장. 성도의 생활(강의)

* 요절 10절.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 강해)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자동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흑암이라는 것입니다.

*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 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강해) 성도의 생활이라는 것은 자기 홀로 사는 생활이 아니고 항상 그리스도의 대언 기도와 연결된 생활입니다. 우리는 죄의 권세 잡은 마귀와 싸우는 것이 성도의 생활이니 아무리 중생을 받은 자라도 고의적이 아닌 실수가 있을 때에 주님은 그를 버리지 않고 항상 대언 기도함으로 그를 붙들어 주고 인도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자기의 양이요 종이니 책임지고 항상 기도하는 주께서 그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내가 애쓰리만큼 애써도 안 될 때 예수님이 대언 기도하십니다. 주님이 인정치 않는 자 대언기도 안 하십니다.
 -. 대언 기도 세 가지
① 우리가 회개하면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한 대언 기도가 있고
② 우리가 회개했지만 넘어지고 쓰러지고 실수하더라도 결심하고 몸을 바쳐 일을 해보겠다는 사람에게 예수께서 이길 수 있도록 대언 기도 해 주십니다.
③ 억울함을 당할 때. 하나님이시여! 아무 종이 억울함을 당하니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하나님 위해 일 해보겠다고 애쓰니 힘을 주시옵소서! 우리 기도가 직접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받으시고 대언 기도로 응답하십니다. 대언 기도를 믿고 낙심 말고 주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 2:2~4.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 강해) 그리스도께서 화목 제물이 되신 것은 온 세계 인류를 위한 것이니 누구든지 속죄를 받은 자는 남을 살리기 위하여 화목 제물 되신 예수님을 전하게 됩니다. 내가 용서를 받았으니 남도 용서를 받도록 해보려는 것이 없다면 이 사람은 성도의 생활이 아니요 거짓 선지의 생활입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대언 기도하는 목적이 완전한 사람을 들어 쓰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자기가 용서를 받은 것 같이 남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마음으로 구원해 주고자 하는 자를 들어 쓰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만을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고 온 세계 택한 자를 구원하자는 것인데 예수의 피로 용서함을 받았다면 남도 용서해 주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남을 살려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제일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핍박할 때 대항치 말고 그 사람위해 기도하면 영계가 올라갑니다. 양심에 잘 못된 것 회개할 때 성신의 불이 들어오고 남을 살려보려고 할 때 생수가 오고 내 살과 피를 짜 바치려는데 그 사람이 대적한다 해도 그를 위해 기도하면 새 힘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정통입니다.

* 2:5~6.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 찌니라.
* 강해) 누구든지 참으로 남을 살려 보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히 역사해서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니 주님이 행할 일을 그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주님은 대언 기도의 목적이 온전치 못한 사람을 들어 쓰시되 완전한 사랑의 능력으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살려 보려는 예수님께서는 남을 살려 보려는 사람을 들어서 완전히 구원해 주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남을 살려보려는 마음이 간절하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들어와 역사하십니다. 남 살려보려고 애쓸 때에 뜻 밖에 좋은 것 주십니다. 열매란 행위가 아니고 중심적인 사랑으로 남을 살려 보려는 마음만 있으면 살릴 수 있는 능력, 지혜, 권세, 말씀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완전치 못한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나도 완전해지고 남도 완전해 집니다. 우리는 항상 남을 살리는데 목적을 두고 생활해야 합니다.

* 2:7~8.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 강해) 하나님은 자체가 사랑이시니 죄인을 구원하는 목적은 당신의 사랑의 법을 세상에서 진행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인간에게는 참된 사랑이 없음으로 그 사랑을 먼저 주시고 사랑 받은 자로서 남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위에 있지 않고 십자가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그 사랑 받은 양심에서 불타야 됩니다. 사랑 받은 사람으로서 그 사랑 남에게 주는 것이 열매입니다. 남을 살려 보려는 마음밖에 다른 것이 없어야 합니다.

* 2:9~11.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 강해) 그러나 형제를 사랑할 줄 모른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받은 자가 아닙니다. 왜냐 하면 사랑을 그 마음에 받았다면 마음이 밝을 것이로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그 심령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이 주관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가 주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자동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흑암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종이 되려면 참으로 남을 살려 보겠다는 심정으로 애써야 참 빛입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헐뜯으면 어두움입니다. 성경 연구하려하지 말고 남을 살려보려고 애쓰면 성경이 밝아집니다.

* 2:12~13.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 강해) 성도라는 것은 그 죄를 완전히 사함을 받고 조물주 하나님은 사랑의 자체이신 것을 알며 또는 악한 마귀와 싸워서 승리의 생활을 하는 것을 성도라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죄 사함 받았다면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알았다면 악마와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 2:14~17.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쫓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쫓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강해) 또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강하고 담대한 사람으로 말씀이 그 속에 있는 자는 흉악한 마귀를 이기는 생활이니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따라가는 타협적인 사랑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정욕을 따라서 오는 것이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라면 도저히 정욕적인 방면으로 흐를 수가 없고 그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은 필연적인 열매가 될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자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남을 살려 보려는 거룩한 진리의 사랑이 아니고는 그 밖의 소위 사랑이라는 것을 따라서 얼마든지 죄를 짓게 되는 마귀의 미혹이 있는 것입니다.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겠다는 것은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것이지 세상을 따라 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왔다면 세상을 불쌍히 여겨야지 끌려가면 안 됩니다. 죄를 용납하고 세상과 타협하고 우상과 타협하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우리가 은혜 받으려면 세상과는 멀어야 합니다.
  살기는 세상에 살아도 전체가 위엣 것만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겠다는 목적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세상을 미워해야 합니다. 진리 사랑 따라 절개 지키면 억울해도 하나님께서 갚아 주십니다.

* 2:18~19.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 인줄 아노라.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 강해) 그러므로 소위 거짓 선지라는 것은 말세 교회를 망치는 타협적인 신앙 노선에서 사도적인 거룩한 신앙 노선을 대적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사도 시대에도 사도의 교훈을 순종치 않고 탈선된 생활에서 나갔던 것입니다.
  오늘에는 이 거짓선지가 큰 세력을 잡고 교회를 망치는 것이 심판기라 하는 것입니다. 사도 교훈 반대하고 니골라 당이 나왔는데 그것이 적그리스도입니다.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지 사도 교훈 지킬 필요 없다는 것이 적그리스도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사도들이 있는 교회 안에서 나왔습니다. 지금은 적그리스도가 교권 잡고 참 종을 쫓아냅니다. 공산당도 교회 안에서 나왔습니다.

* 2:20~21.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 강해)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이니 이 진리라는 것은 성신이 가르치는 아래서 성경을 기록한 것이요 또는 그 진리를 바로 깨달아서 믿게 하는 것도 성령의 역사로만 되는 것이니 여기에는 조금도 가감할 수 없는 정확 무오 한 진리입니다. 성신으로 기록한 성경, 성신 받은 사람은 자동적으로 알게 되고 믿어집니다.
  사도 요한이 기름 같은 성신을 받으면서 글을 썼으니 우리도 기름 같은 성신 받으면 성경이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기름 같은 성신 받고 진리를 아는 것이 기독교 정통입니다. 하나님 자체가 신학인데 성신으로 잉태해서 성신으로 탄생하시고 성신으로 역사해서 성신을 부어주시니 성신 받은 사도 들이 쓴 글이니 우리도 성신 받으면 환합니다. 절대 진리의 신이 온 사람에게 거짓이 있을 수 없습니다.

* 2:22.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 강해) 적그리스도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도성인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그대로 믿지 않고 자기의 주관이나 지식을 따라 판단하는 것은  고의적으로 진리를 부인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면 적그리스도입니다. 부인이라는 것은 말씀 그대로 믿지 않으면 부인입니다. 절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일획을 가감할 수 없습니다. 가감하면 부인이나 다름없습니다.
* 2:23~24.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 강해) 우리 성도의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절대적으로 시인하되 처음부터 가르친 교훈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니 이러한 자라면 아버지와 아들 안에 있는 성도의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절대로 거짓이 없다는 것을 믿는 동시에 조금도 변치 않고 나가는 것을 성도의 참된 신앙 노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과 주님 안에 들어가려면 말씀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은혜시대에는 사도적인 교훈 그대로 믿어야 성신 옵니다. 환난시대에는 환난시대 교훈 그대로 믿어야 권세가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책에 기록된 대로 역사하시니 그 말씀에 거하면 역사가 옵니다. 말씀이 깊어야 영계가 높습니다. 말씀 안에서 참 하나님, 예수님 만나 봅니다. 모든 성경대로 믿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십니다.

* 2:25~28.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 강해) 신앙에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약속을 믿는 동시에 절대로 마귀와 싸워서 승리하여야만 되는 것입니다. 싸움이라는 것은 육적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싸우는 것이니 성령을 받은 자로서 어떤 세상의 학적인 인간 지식에 끌리지 않고 완전한 진리의 신의 가르침을 받아 거짓이 없는 진리 안에서 사는 생활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의 어떤 두뇌에서 난 학적으로서 진리를 분석한다는 것은 거룩한 사도 신앙의 대적이 되는 것이니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께 받아 기록한 말씀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 생활이라면 누구든지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담대히 서게 되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왜냐 하면 다시 오시는 주님은 성경에 기록한 말씀대로 끝까지 지켜 나가는 자를 위하여 오시기 때문입니다.
  기름부음이 우리 위에 임하면 다 진리를 알게 되고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전부가 체험이요 인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체가 영원한 생명이니 범죄로 이 생명을 잃은 자에게 다시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는 것이 말씀이요, 그 생명을 기업으로 얻기까지 역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식이라는 것은 하등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 오실 때 부끄럽지 않으려면 사도가 가르친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절대 가감하면 안 됩니다. 이루어진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면 앞으로 될 일도 글자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성경은 전부 글자 그대로입니다. 상징, 영적으로 하면 큰일입니다. 누구든지 사도가 가르친 교훈에 그대로 거해야 합니다.

* 2:29.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 강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줄 알고 믿는다면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라야 참으로 하나님께로 난 자라고 볼 수  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로 난 자가 그 진리를 순종하는 것은 필연적인 열매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니까 우리도 의롭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참되시니 우리도 참되고, 하나님께서 겸손하시니 우리도 겸손해야 됩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는 것보다 우리 하나 바로 만드는 것이 더욱 힘이 듭니다.

 # 우리의 대언자 예수(요일서2:1~2, 28~29).
  주님은 십자가에서 승리한 자이심으로 우리의 대언자로서 다시 올 때까지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대언이라는 것은 어떠한 사람을 위해서 대언 하느냐에 대해서 본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1. 양심적인 고백이 있는 자(1:9).
  하나님은 죄를 사해 준 것이 마땅한 의무이지만, 고백이 없는 사람을 사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미 화목제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고백을 받고, 하나님 앞에 고백한 자를 위하여 대언기도 해주는 것은 고백할 공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죄 값은 용서 없이 죽는다는 율법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2. 실수한 자(2:1-2).
  이미 자백을 하고, 속죄를 받은 자라도 또 다시 실수가 있는 경우에 그 사람이 이미 올라간 기도가 있기 때문에 대언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여, 나를 죄를 짓지 않도록 해 주시옵소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해 주시옵소서” 라고 이런 기도를 할 때 그는 대언 기도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성령을 보내서 다시 부흥을 주고, 시험에서 다시 이기는 큰 힘을 주기 위해서 주님은 대언기도 하는 것입니다.

3. 주 강림 시에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하여 대언기도 하는 것입니다(2:28-29).
  우리의 완전이라는 것은 주님의 대언기도로 되는 것입니다. 약한 자를 능하게 하기 위하여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하기 위하여 심지어 잠든 자를 깨우치기 위하여 문을 두드리는 심정을 가지신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문 밖에서 재촉하는 것입니다(계3:19-20). 주님은 당신의 택한 종이 쓰러지고 피곤해 어찌할 줄 모를 적에 여호와만 바라봐도 새 힘을 받도록 끔 역사하는 것이 대언기도로 되는 것입니다(사40:30).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마귀 압력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강권역사로 나리는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주 강림 시기는 마귀도 극도로 참소하고 주님도 극도로 강하게 대언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안에만 있는 자라면 된다는 것입니다.

  * 주님은 일 천 구백 년 동안을 대언기도로서 승리를 이루어 온 것입니다. 만일 주님의 이와 같은 간구가 아니라면 마귀 참소를 벗어날 종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롬8:34-35). 바울이 이것을 믿고, 누가 나를 그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는 용기를 가지고 나섰음으로 그는 승리의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용기를 가지고 나서지 않고는 도저히 승리를 거둘 수 없을 것입니다.

  #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된 자(요일서2:1~2, 28~29).
  인생이라는 것은 온전케 된 자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한 때에 세계를 움직이는 영웅으로 나타났다 하여도 그 시대사람 중에 선구자라고 볼 수는 있지만, 온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서 온전케 될 때에 인간으로서 알 수 없는 것을 알게도 되고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을 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자체가 온전해지기를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요, 당신의 사랑이 사람 속에서 온전케 되기를 목적하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온전케 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으로 증거 합니다.

1. 우리를 위하여 화목 제물 된 사랑(1-2).
  타락한 인생을 온전케 하는 역사는 전부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는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죄를 진 인간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지만, 죄 값대로 심판을 나릴 하나님께서 심판 받을 인간에게 심판을 나리지 않고, 화목하자는 사랑에서 먼저 인간의 죄를 위하여 그 아들을 화목 제물로 세우신 것이 인간을 온전케 할 수 있는 사랑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말에 있지 않고, 실천에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온전하게 되는 것은 오직 화목 제물 되신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열매가 있게 되므로 그 사랑을 남에게 주기 위한 역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기독교의 온전한 역사라는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 안에 이 사랑의 역사가 없다면 자동적으로 전부가 거짓이 되고 맙니다. 그리스도께서 화목 제물 되신 것을 믿는 양심 속에 그 사랑을 남에게 주는 것이 없다면 그 사랑을 받은 자라고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자에게 온전케 하는 사랑(3-5).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람에게든지 온전케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자에게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람에게든지 무조건 온전케 된다면 공의가 없는 것입니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심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화목 제물 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자에게 역사하기 위하여 지금도 항상 대언기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 역사라는 것은 말씀대로 행하시는 역사이니 그 말씀대로 지키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라는 것은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자가 말씀대로 행하지 못한 죄를 깨닫고 말씀대로 행하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때에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역사가 오는 것은 화목 제물 되신 예수님의 대언기도를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오늘에 기독교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만, 그 사랑이 자기 속에서 온전케 되는 체험을 받은 자는 심히 적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말씀대로 행하려고 하는 것이 너무나 미약한 원인입니다. 누구든지 말씀대로 행하려는 것이 강한 자라면 그 사랑의 역사도 강하게 오는 것입니다.

3. 예수의 행하시는 대로 행하게 되는 일(6).
  신앙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믿는 동시에 지금도 행하시는 그 역사대로 따라서 행하는 것을 신자의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함으로서 그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고 그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순종하겠다는 마음이 불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역사가 우리 속에 와서 역사함으로써 우리는 그 역사에 따라서 행해지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된 자의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나뭇가지가 진액을 받되 그 진액이 온전케 되어 열매가 맺어진 가지는 더 가꾸고, 진액을 받되 그 진액이 온전케 되지를 못한 가지는 제하여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된 자라야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왕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한 것이니, 그 사랑이 온전케 된 자만 그 사랑 속에서 구하면서 그의 역사대로 쓰여 지는 인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 사랑은 세 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으며,
  둘째는 자기가 이익을 보기 위하여 남을 사랑하는 사랑도 있으며
  셋째는 자기가 남을 사랑하되 그 사랑이 온전케 되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도 아니요, 하나님이 당신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도 아니요, 당신의 아들을 희생시켜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의심 없이 믿고 순종하는 사람 속에 온전케 되는 사랑인 것입니다.

#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인격(요일서2:24~29).
  인생의 최고의 인격은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수 있는 인격입니다. 왜냐하면 스바냐 1장을 보면 모든 이방 종교나 정치인이나 모든 사람이 다 소멸될 때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만 남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 앞에 옳은 것 같아도 심판 날에 서지 못할 인격도 있고, 아무리 사람이 볼 때 멸시와 천대를 받아도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자가 있다는 것이 말세 교훈 중에 뚜렷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인격을 다음과 같이 성경에서 자세히 찾아보기로 합니다.

1. 원망하지 않는 자입니다(약5:8).
  하나님께서 심판기가 올 때는 극도로 당신의 택한 종에게 원망스러운 일이 부딪혀 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략이니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수 있는 인격을 이루기 위한 훈련에 불과합니다. 인생은 자체가 완전한 것은 못되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히 생각해서 무슨 일을 당하든지 원망하지 않는 것 하나를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2.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입니다(약2:13).
  하나님은 남을 살려 보려고 눈물 흘리며 올리던 기도와 소원을 다 풀어 주는 것이 심판이니 오히려 심판 날에 나서서 자랑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로 원하는 것은 당신이 긍휼히 여기는 자를 같이 긍휼히 여기면서 애쓰는 사람을 귀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이 양떼를 불쌍히 보는 심정이 없는 목자라면 심판대 앞에 설 수는 없을 것입니다.

3. 작은 일에 충성한 자입니다(마25:22).
  하나님은, 충성이라는 것은 작은 일에서부터 보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작은 일에 충성이라는 것은 하나님만 중심하는 일이 아니라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 앞에 크게 보이는 것만을 목적한다면 상을 이미 다 받는 일이 될 것이니 지극히 작은 일에 하나님께 대한 양심으로 일할 적에 숨은 사랑을 받는 종으로서 심판대 앞에는 전부 상급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4. 형제와 화평을 위하여 노력한 자입니다(롬12:17-19).
  만일 화평을 위하여 노력이 없다면 심판 날에 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수를 갚는 심판이니 원수를 맺는 일이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종이 남을 공연히 판단을 했다면 자기도 판단을 받는다고 주님은 말했습니다(마7:1).
  심판대 앞에 담대하려면 아무리 형제가 원수같이 나를 미워해도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한 사람만이 심판대 앞에 설 자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5.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종입니다(마24:45-46).
  이것은 종이라는 것은 맡은 일에 충성을 하되 시대를 따라서 진리를 바로 증거 해야만 된다는 뜻이 내포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심판은 복음대로 심판하는 것이니 은혜시대 종이 그 시대적인 진리를 바로 증거 못했다면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요, 말세의 종이 환난 시대 진리를 바로 증거 하지 못했다면 그 때 사람들의 생명에 대하여 책임을 질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승 된 자의 심판이 크다고 야고보 3:1에 가르친 것입니다. 진리를 증거 한 종만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아끼고 아끼는 심정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붙들어 주시고 일으켜 주시는 것은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수 있는 인격이 되어 주시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이라는 것은 당신의 사람을 위하여 심판하는 것이니 당신의 사람이 부족한 것을 그냥 두고 심판하면 하나님은 막대한 손해가 되기 때문에 강권으로라도 심판대 앞에 서게 하겠다는 것이 기독교 종말에 심판기의 역사입니다. 

가르친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요일서 2:24-29).
  기독교는 세계 통일의 완전 교훈을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이니 그 시대를 따라 변하는 것이 교회가 아니고, 그 교훈 안에 그대로 거하는 생활을 할 때에 그 교훈대로 이루어지는 체험에서 그 시대 사람에게 각성을 주는 것이 기독교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요일서2:27에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에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친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 하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교파의 울타리 안에서 거하는 것보다도 가르친 그대로 가감 없이 생활할 때에 다음과 같은 축복이 있습니다.

  1.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24-25).
  가르친 교훈은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교훈이니 그 교훈에서 가감된 생활이 있다면 영원한 생명은 그 생활에 있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든다면 진액이 없는 나무가 발전이 없듯이 영원한 생명이 없는 생활에서 아무런 생활에 산 체험적인 발전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을 적에 산 믿음이요, 없을 적에 죽은 믿음입니다.    기독교의 신앙 체험이라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항상 그리스도께로부터 흘러오는 것이니 이것을 가르친 그대로 그 안에서 생활하는 자만이 받게 되는 체험입니다.

  2. 기름 부음을 받게 됩니다(26-27).
  완전한 열매라는 것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게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두뇌에서 나오는 교훈은 물질에 국한된 교훈이니 사람이 가르치고 연구하는 범위 안에 있는 것이요, 기독교 안에 교훈이라는 것은 기름 부음을 받은 종들이 성령으로 가르침을 받아 기록한 것이므로 인생에게 완전한 것을 주는 교훈이니 완전치 못한 인간의 지식이 완전한 것을 가르치는 교훈에는 아무런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의 가르친 교훈 안에 거하는 자라야 그들이 받은 기름 부음을 같이 받으므로 그들이 못 다한 사명을 우리가 계승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주의 날에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24).
  주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셔서 부활 승천하기까지 행하신 일은 죄인을 부르기 위한 법을 완성하신 것이요, 다시 강림하실 때는 가르친 교훈 그대로 생활하며 싸워서 승리한 자에게 갚아 주려 오시는 날이니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라 하여도 가르친 그대로 교훈 안에 거하며 생활하지 않은 자는 주의 날에 부끄러움 당할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어느 학생이 시험을 보는 날에 가서 그 선생이 가르친 교훈 그대로 답을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 많은 종들이 각각 자기의 주관을 세우면서 여러 가지 학설을 말한다는 것은 오히려 위험한 일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교훈 안에 그대로 있지 않는 생활이 되기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운 사도들의 교훈 그대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조금도 혼선이 없고, 조금도 가감이 없는 정확한 다림줄의 진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가르친 교훈은 하늘이 돈다는 과학이 지구가 돈다는 과학으로 변해진 것은 사람은 완전한 지식을 가진 것이 아니고, 나날이 발전하는 두뇌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한 조물주의 교훈이니 조금도 사람이 가감할 수 없는 교훈이므로 그 말씀대로만 순종할 때에 주의 날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왕권의 영광을 영과 육이 아울러 받게 되므로 담대함을 얻는 인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허공을 치는 바람잡이 생활은 하나님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않는 생활이요, 가장 작은 일에서 큰 열매를 가져오는 생활은 그 교훈 안에 거하는 생활이라고 보게 됩니다.    갈릴리 해변에서 불학무식한 사람으로 어장을 버리고 예수를 따를 적에 너무나 어리석은 일 같으나 요한이 교훈 안에 거하므로 완전한 승리의 사도로서 기독교 종말의 진리를 하나님께 받은 사도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약한 자라도 교훈 안에 거할 때에 강한 자가 되고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그 교훈 안에 거하게 될 때에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역사하시되 교훈대로 역사하는 데는 교훈 안에 거하는 사람을 들어 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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