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메뚜기와 하루살이와 개구리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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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1-04-29 11:31 조회1,57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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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메뚜기와 하루살이와 개구리 친구
가을 들녘에 황금물결이 들 즈음에 메뚜기가 하루살이와 친구가 되어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메뚜기가 친구야 저녘이 됐으니
내일 다시 만나 놀자하고 헤어지려하니 하루살이가 내일이 무어야 하고 이상히 여기니
메뚜기 또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는 잠자리를 구하러 가고 하루살이는
내일을 살아본 일이 없음으로 내일의 약속을 이해를 못한 것이외다.
이튿날 메뚜기는 개구리와 친구를 했다 잘못하면 잡혀 먹힐 수 있는데도
친구가 되어 다정히 놀아 주게 되었소이다.
그런데 늦가을이 되어 개구리는 겨울잠을 잘 때가 되어 메뚜기에게 말하기를
이제 해어졌다가 겨울이 지나서 따뜻한 봄이 되면 다시 만나자고하니
메뚜기는 겨울이 워지 또 따뜻한 봄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으니 대답 할 수도 없고
이해가 안 되니 쳐다 볼 수밖에 없었소이다.
개구리 또한 겨울을 모르고 봄을 모르는 메뚜기를 이상한 듯 쳐다보다가
갈 길을 가고 말았소이다.
짧은 인생 하루살이 같은 인생을 살면서 하루살이만한 지식을 가졌는데
마치 모든 일을 알고 그 일을 논하고 주장하는 것이 온전할 수 있겠는가?
내일을 모르고 추운 모진 겨울도 모르고 따뜻한 봄도 모르는데 어찌 논 할 수 있으리오?
인간 칠십을 살면서 영원의 시간을 긴 세월을 논하는 것이 어찌 정당 할 수 있으리오?
정확 할 수 있겠는가 말이외다.
자그마한 인간의 지식으로 공의와 정의를 논하는 것이 가당치도 않건만
마치 결론을 내리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웃을 만한 인간의 어리석음이라 하는 것이외다. 적어도 영원을 논 할 수는 없다 해도 눈에 보이는 세계도 칠천년의 경륜을 알아야
공평한지 불공평한지 불완전한 판단이라도 해보지 인간을 칠십도 살아보지 못한 처지에
어찌 불평을 불공정을 논할 수 있겠소이까?
대충을 논해보면 번성하고 생육하는 시간이 일천 오백년이요
심판의 경험과 법과 경륜과 경험을 쌓는 시간이 이천년이요
법을 세워서 일부 민족적인 일(종교)에서 세계적인 일로 알게 하는 것이 이천년이요
지도자와 백성을 구분하기 위해서 악을 하락한 세월이 육천년이요
복을 주고자 하되 삶의 열매에 따라 심판하고 악을 허락하지 않은 복된 세월이 천년이요
모든 인간을 선악 간에 판단하여 영원한 형벌과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하는 것이
지구 칠천년의 경륜이니 이것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인간이 교만하다가 죽는 것이
정한 이치이리요.
이 시대의 현자를 어디서 만나 볼 꼬?
한번 생각 해 볼일 아니겠소?
아무 때나 추수는 할 수 없는 법 가을이 되어야 추수를 하듯이 어떤 사상으로
어떤 악행을 하면서 사는 것은 자유이지만 반드시 그에 상응한 심판이 있을 것이니
하루 사이에 보이는 것을 보고 판단하고 원망치 말지어다.
어리석은 하루살이 인간들아 인간 가을 추수 때가 곧 도래 하리니
진리에 지혜에 귀를 귀 기우려 볼지어다.
진리를 듣는 귀가 복되고 볼 수 있는 눈이 복되도다.
잠시잠간 안타까운 심정으로 몇 자 지껄여 봤소이다.
오늘도 복되고 새로운 날이 되기를 바라겠소이다.
가을 들녘에 황금물결이 들 즈음에 메뚜기가 하루살이와 친구가 되어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메뚜기가 친구야 저녘이 됐으니
내일 다시 만나 놀자하고 헤어지려하니 하루살이가 내일이 무어야 하고 이상히 여기니
메뚜기 또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는 잠자리를 구하러 가고 하루살이는
내일을 살아본 일이 없음으로 내일의 약속을 이해를 못한 것이외다.
이튿날 메뚜기는 개구리와 친구를 했다 잘못하면 잡혀 먹힐 수 있는데도
친구가 되어 다정히 놀아 주게 되었소이다.
그런데 늦가을이 되어 개구리는 겨울잠을 잘 때가 되어 메뚜기에게 말하기를
이제 해어졌다가 겨울이 지나서 따뜻한 봄이 되면 다시 만나자고하니
메뚜기는 겨울이 워지 또 따뜻한 봄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으니 대답 할 수도 없고
이해가 안 되니 쳐다 볼 수밖에 없었소이다.
개구리 또한 겨울을 모르고 봄을 모르는 메뚜기를 이상한 듯 쳐다보다가
갈 길을 가고 말았소이다.
짧은 인생 하루살이 같은 인생을 살면서 하루살이만한 지식을 가졌는데
마치 모든 일을 알고 그 일을 논하고 주장하는 것이 온전할 수 있겠는가?
내일을 모르고 추운 모진 겨울도 모르고 따뜻한 봄도 모르는데 어찌 논 할 수 있으리오?
인간 칠십을 살면서 영원의 시간을 긴 세월을 논하는 것이 어찌 정당 할 수 있으리오?
정확 할 수 있겠는가 말이외다.
자그마한 인간의 지식으로 공의와 정의를 논하는 것이 가당치도 않건만
마치 결론을 내리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웃을 만한 인간의 어리석음이라 하는 것이외다. 적어도 영원을 논 할 수는 없다 해도 눈에 보이는 세계도 칠천년의 경륜을 알아야
공평한지 불공평한지 불완전한 판단이라도 해보지 인간을 칠십도 살아보지 못한 처지에
어찌 불평을 불공정을 논할 수 있겠소이까?
대충을 논해보면 번성하고 생육하는 시간이 일천 오백년이요
심판의 경험과 법과 경륜과 경험을 쌓는 시간이 이천년이요
법을 세워서 일부 민족적인 일(종교)에서 세계적인 일로 알게 하는 것이 이천년이요
지도자와 백성을 구분하기 위해서 악을 하락한 세월이 육천년이요
복을 주고자 하되 삶의 열매에 따라 심판하고 악을 허락하지 않은 복된 세월이 천년이요
모든 인간을 선악 간에 판단하여 영원한 형벌과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하는 것이
지구 칠천년의 경륜이니 이것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인간이 교만하다가 죽는 것이
정한 이치이리요.
이 시대의 현자를 어디서 만나 볼 꼬?
한번 생각 해 볼일 아니겠소?
아무 때나 추수는 할 수 없는 법 가을이 되어야 추수를 하듯이 어떤 사상으로
어떤 악행을 하면서 사는 것은 자유이지만 반드시 그에 상응한 심판이 있을 것이니
하루 사이에 보이는 것을 보고 판단하고 원망치 말지어다.
어리석은 하루살이 인간들아 인간 가을 추수 때가 곧 도래 하리니
진리에 지혜에 귀를 귀 기우려 볼지어다.
진리를 듣는 귀가 복되고 볼 수 있는 눈이 복되도다.
잠시잠간 안타까운 심정으로 몇 자 지껄여 봤소이다.
오늘도 복되고 새로운 날이 되기를 바라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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